사랑했던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 사랑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걸까요. 이치조 미사키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기억을 잃는 소녀와 그 곁에 머무는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소설입니다. 설정만 보면 눈물을 위한 청춘 로맨스로 보일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기억과 사랑,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남기는 흔적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작품의 출발은 오히려 가볍습니다. 가미야 도루는 친구를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같은 반의 히노 마오리에게 거짓 고백을 합니다. 진심으로 시작하지 않은 관계인데도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일상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마오리에게는 평범한 연애를 어렵게 만드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소설의 중심은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될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내일이면 오늘을 잊는 사람에게 오늘의 행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에서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 이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는 바로 그 질문에 있습니다.
작품: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저자: 이치조 미사키
원제: 《今夜、世界からこの恋が消えても》
일본 출간: 2020년 2월 22일
일본 출판: KADOKAWA 메디아웍스문고
수상: 제26회 전격소설대상 메디아웍스문고상
핵심 주제: 기억, 사랑, 상실, 배려, 관계가 남기는 흔적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줄거리와 기억의 설정
가미야 도루와 히노 마오리의 관계는 거짓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마오리는 그 고백을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처음에는 진짜 연애와 거리가 먼 관계였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도루는 마오리가 전향성 기억상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잠이 들고 나면 그날 새롭게 생긴 기억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오리는 기록을 통해 자신의 하루를 이어갑니다. 어제의 자신이 남겨놓은 기록을 읽으며 오늘의 자신이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입니다. 보통 연애는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이면서 관계가 깊어집니다. 어제 함께 웃었던 기억, 처음 손을 잡았던 순간, 사소하게 다퉜던 일까지 축적되면서 ‘우리’라는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마오리에게는 그 자연스러운 축적이 어렵습니다. 도루에게는 분명 존재하는 어제가 마오리에게는 기록으로 확인해야 하는 과거가 됩니다. 두 사람이 같은 하루를 보냈음에도 다음 날에는 그 하루를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셈입니다.
기억할 수 없는 행복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고 두 사람의 하루를 통해 천천히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도루의 선택이 중요해집니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만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오리가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데 마음을 씁니다. 내일 기억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오늘 웃었다면 그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 부분에서 작품은 기억과 행복을 반드시 같은 것으로 묶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순간을 오래 기억해야 그 시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남기고 기록을 하고 기념일을 기억하는 것도 그런 마음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 소설은 조금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순간도 실제로 존재했고, 그 순간의 감정 역시 분명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사라지는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단순한 기억상실 로맨스와 조금 다르게 만드는 지점은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감정’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정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했던 선택과 행동, 함께 지낸 시간 동안 달라진 마음까지 포함합니다.
마오리는 하루의 기억을 계속 이어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하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했던 순간에는 실제 감정이 존재합니다. 기억이 사라진 뒤에도 그 시간이 완전히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작품의 중요한 정서적 기반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기억으로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사랑이 꼭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했던 선택, 상대가 조금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랐던 마음, 그 관계로 인해 달라진 삶까지 모두 사랑이 남긴 흔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루의 마음도 이 지점에서 인상적입니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기억하는지보다 그 사람이 오늘 행복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상대에게 어떤 하루를 남겨주고 싶은가’라는 방향에서 바라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이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관계라면 한 사람만 계속 희생해서는 안 되고 서로의 마음과 필요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다만 소설 속 극단적인 상황은 우리가 관계를 바라보는 평소의 기준을 잠시 흔드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을 기억해주는 것이 중요한가, 사랑했던 사람의 행복이 중요한가.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남기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더라도 상대가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가. 작품은 이런 질문들을 인물의 선택 속에 놓아둡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제목의 의미도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사랑이 사라진다’는 표현이 기억을 잃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따라가면 사라짐과 남겨짐의 경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치조 미사키가 보여주는 사랑, 소유보다 상대의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
이 소설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좋아한다’는 감정보다 그 감정 이후의 행동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는 특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상황을 알게 된 뒤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줍니다.
도루와 마오리의 관계가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완벽한 미래를 약속하기보다 지금 가능한 하루를 만들어갑니다. 먼 훗날을 장담할 수 없기에 오늘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해집니다.
사실 이것은 마오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도 지금과 같은 관계가 이어질 것처럼 살아가지만 어떤 관계도 영원히 동일한 형태로 지속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고, 환경이 변할 수도 있으며, 예기치 않은 이별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오리의 기억은 우리가 평소 잊고 살아가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있는 사람이 내일도 당연히 곁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대하는가일 것입니다.
작품 속 우정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와타야 이즈미를 비롯한 주변 인물의 존재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삶이 연인 한 명과의 관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보입니다. 사랑과 우정, 가족에 대한 마음이 겹치면서 한 사람의 기억과 삶을 지탱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연애소설로만 읽으면 작품의 일부를 놓치게 됩니다. 중심에는 분명 도루와 마오리의 관계가 있지만, 그 관계를 통해 결국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라는 더 넓은 질문입니다.
이후의 전개에는 작품의 감정을 크게 움직이는 요소가 있으므로, 처음 읽는 분이라면 상세한 결말을 모른 채 읽는 편이 좋습니다. 이 소설은 설정을 알고 시작해도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중요한 전환점을 미리 알게 되면 후반부에서 인물들의 행동을 바라보는 경험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만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가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 뒤 서로의 삶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도 실제로는 비슷합니다. 모든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함께 먹었던 음식이나 걸었던 길도 언젠가는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 때문에 생긴 습관이나 생각, 선택은 예상보다 오래 남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억이 흐려졌다고 해서 관계까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그 질문에 대해 관계가 남기는 것은 기억만이 아니라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확장합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의 나와 만난 뒤의 내가 다르다면, 이미 그 사람은 내 삶의 일부에 흔적을 남긴 셈입니다.
이 작품이 특히 잘 맞는 독자는 감정선이 선명한 청춘소설을 좋아하면서도 단순한 연애 이야기 이상의 주제를 찾는 분입니다. 기억과 상실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빠른 사건보다 인물의 마음과 선택을 따라가는 작품을 선호한다면 읽어볼 만합니다.
반대로 현실적인 연애 묘사나 복잡한 사회적 배경을 기대한다면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정을 강하게 움직이도록 설계된 설정 역시 독자의 취향에 따라 평가가 갈릴 만합니다. 그럼에도 기억이라는 소재를 사랑의 조건과 연결한 방식은 작품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만들어줍니다.
✓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로 제26회 전격소설대상 메디아웍스문고상 수상작입니다.
✓ 가미야 도루와 하루의 새로운 기억을 유지하기 어려운 히노 마오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 기억상실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행복에도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핵심 설정입니다.
✓ 작품은 사랑을 소유나 기억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선택과 관계가 남긴 변화까지 확장해 바라봅니다.
✓ 큰 전환점과 결말을 모른 채 읽을수록 인물의 선택이 지닌 의미를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치조 미사키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일본에서 2020년 2월 KADOKAWA의 메디아웍스문고를 통해 출간됐으며 제26회 전격소설대상 메디아웍스문고상 수상작입니다. 이후 후속작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로 이야기가 이어졌고, 영화로도 제작되면서 원작을 접하는 독자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책을 덮고 나면 제목에 있는 ‘사라진다’라는 말보다 오히려 무엇이 남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억은 흐려질 수 있고 관계는 끝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로 인해 행복했던 하루와 그 사람 때문에 조금 달라진 자신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사랑을 기억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억 너머에 남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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